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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어린이재단 방숙자 명예 이사장님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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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일보
기사입력 2021-02-20

▲     ©뉴욕일보

“이 지구상에 굶주리는 어린이 있으면 안돼”

 전세계 어린이들을 가슴에 품으시던 大人

 

지난 2월 1일, 글로벌 어린이재단(Global Children’s Foundation, GCF) 방숙자 명예이사장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오늘의 GCF가 있기까지 이 세상의 어린이는 한 명도 절대 굶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분, 온 심혈을 기울여 오로지 한 곳만을 바라보고 사신 방숙자 명예이사장님. 안타깝게도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방이사장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하면서 필자와의 첫 만남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필자는 NMC(국립의료원 간호대학) 미동부지역 동문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미국 내 동문들의 주소를 업데이트 할 때였다. 1회부터 시작되는 동문주소록 맨 위에 크게 한 칸을 차지하면서 ‘방숙자 은사님’이라고 쓴 글귀에서 마치 큰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 꼭 한 번 만나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한 지인과 함께 동석한 자리에서 뵈온 방이사장님의 첫 모습은 발그스레한 두 볼의 영낙 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차즘 이야기를 이어 나가면서 필자에게 와 닿은 느낌은 강한 지조의 여인이었다. 흔히 나이가 들면 으레껏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방이사장님은 달랐다. 본인이 왜, 누구를 반대하는지 그 사람의 정책에 빗대어 대화를 풀어 나가시고 꼭 당신과 반대 입장의 이야기에 꼼꼼히 귀 기울이시는 습성이 몸에 배신 분이셨다. 

 

1931년 8월 4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신 방이사장님은 천성이 눈물과 정이 많으신 분이다. 순천에서 여중고를 졸업하고 발을 들인 서울생활은 그리 녹록지않았다. 서울시립간호학교를 수료하고 곧 이어 이듬해(1952)에 입학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법정대)에서 제대로 된 4년제 교육을 받고 학사자격을 따게 된다. 이 당시는 바로 6·25 전쟁이 끝난 후라 한국의 정치계나 학계 모두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때 처음 발을 디딘 국립의료원 간호학교에서의 시절은 결코 잊지 못한다. 6·25동란 후, 대한민국과 스칸디나비안 정부 사이에 의료관계를 맺어 의료진들을 상주시키는 법이 통과되고 이로 인해 탄생된 병원이 국립의료원이고 부설 학교가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이다. 방이사장님은 이곳 국립의료원 간호대학(통칭 NMC)에서 사감 겸 간호학과 교수를 하게 되었다. 아마 그 시절 사정상, 교수라해도 거의 초창기였으므로 학교설립에 함께 힘쓴 학감(Dean)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 뉴욕을 비롯, 미주지역의 NMC 1-5회 졸업생들은 이 때의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후, 한국보다 훨씬 간호학이 발달한 곳에서 좀 더 진보된 공부를 하기 원해서 택한 곳이 스코트랜드 에딘버러 대학의 간호학과였고 이 곳에서 1963년 간호학 석사를 마친다. 학위를 갖고 돌아온 내 조국은 한참 새마을운동의 불꽃이 피어나고 동네마다 개간산업 등, 일차산업에 중점을 둔 때였다. 

 

미국이나 유럽쪽에서 공부한 한국 간호학과 교수가 턱없이 부족했고 방이사장님은 이때 가톨릭대학의 간호학과 교수로 제자 양성에 힘쓰고 있을 때다. 이때 간호협회 모임에서 그 당시 대한적십자사 간호사업국장 유분자 님(현재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과의 조우는 결국 한 지향점을 바라보고 가는 친자매같은 친구가 되었고 훗날 미국을 거쳐 GCF 창립의 주춧돌 역할을 해내는 평생지기가 되었다. 

 

1965년 개정된 미국의 이민법에 의해서 미국 취업이민의 길이 열리고, 1968년 방이사장님 일생일대의 큰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선택인 텍사스 달라스 파크 메모리얼 병원으로 취업 오퍼를 받아 떠나게 된다. 

1972년, 워싱턴으로 거처를 옮긴 방이사장님은 워싱턴DC에 여성상담소를 설립, 소장과 고문으로 계시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이제 40을 갓 넘긴 여성 혼자의 몸으로 여성상담소에서 소장 역할을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가정문제, 자녀문제, 경제문제 등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오는 여성들과의 카운셀링을 통해서 정신적인 문제의 해결 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도 때로는 해결해 줘야 했을 것이다. 

 

여성들을 돌보는 과정 가운데서도 틈틈이 자기 발전에 힘쓴 방이사장님은 1976년 워싱턴 DC의 가톨릭대학에서 간호학 및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는다. 잠시도 스스로에게 안일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성격은 언제 어느 곳을 가시든지 뚜렷이 나타났다. 

 

한국의 1980년대는 군부독재의 가장 피크를 이루었던 시기로 5·18을 비롯해 한참 민주화운동의 불꽃이 피었을 때다. 그 시절, 여럿 민주인사들이 소위 블랙리스트에 올라 발이 묶이게 되었고 불의를 보면 못 참으시던 방이사장님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한동안 조국방문의 길이 막혔었다.

 

1998년 한국에서는 IMF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나앉는 시대였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과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미국방문에서 방이사장님은 이희호 여사의 초대를 받게 된다. 한국은 가장이 직장을 잃게 되니 학교마다 결식아동이 생겨나고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다. 국가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형편인지라 영부인이 울먹이며 미국의 한인어머니들에게 어린이 돕기 운동을 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때 탄생된 재단이 오늘날 GCF의 전신인 ‘미주나라사랑어머니회’다. 

처음 창단 멤버인 3인이 각각 방이사장님이 총회장, 유분자 이사장님이 서부회장 그리고 손목자 명예이사장이 사무총장을 맡아서 전국기구로 키우게 되고 그때 모금한 2만 달러는 그 시절 한국의 경제상황으로는 무척 큰 금액이었다. 그 후 빠른 시일 내에 대한민국은 IMF를 극복하게 된다. 

 

조국이 IMF를 극복하면서 나라사랑어머니회는 더 크고 원대한 앞날을 위해서 발전적 해체를 결정하고 현재의 이름, ‘글로벌어린이재단(Global Children’s Foundation)’으로 개편되어 수혜 대상을 한국의 어린이에서 전 세계의 어린이로 넓히게 된다. 1998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23년째인 글로벌어린이재단은 명실공히 세계를 무대로 하는 큰 거목으로 자랐다. 현재까지 전 세계 23곳에 지부를 두고 6,000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는 글로벌어린이재단은 모금액만도 450만 달러가 넘었고 전 세계 어린이 52만명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2001년 코원(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창립 후, 줄곧 미동부담당관으로 또한 작년까지 고문으로 봉사하시던 방이사장님은 그동안 한국과 미국을 위해 봉사한 노고로 △1953년 대한민국 정부포상 △1999년 김대중 대통령 공로상 △2002년 찰즈 랭글 커뮤니티 봉사상 △2007년 이화여자대학교 ‘아름다운 이화인’상 △2017년 엘리스 아일랜드 공로상, △2018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많은 상을 받으셨다. 

방숙자 명예이사장님, 당신 슬하에 자식은 없으셨지만 반평생을 어린이를 위해 사신 당신은 전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을 품에 품으셨습니다. 굶주리는 어린이 없는 세상을 그리도 바라시고 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신 당신의 뜻은 지금 이 시간도 후진들이 이어 받아 더욱 빛을 발하고 있으니 하늘나라에서 격려와 응원 보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눈물 없고 고통없는 곳에서 평안히 영면하소서!   

삼가 GCF 방숙자 명예이사장님 영전에 바칩니다.   

 

(전)NMC 미동부지역 동문회장, (현)GCF 홍보담당임원 정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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